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미토모 그룹 (문단 편집) == 창업 == 창업자는 스미토모 마사토모로 [[후쿠이현|에치젠]] 출신으로 원래 [[승려]]였으나[* 법명은 구젠(空禅)으로, 밀교 계통인 열반종(나중에 천태종에 흡수됨) 소속 사찰에서 수행했다.] 직업에 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스미토모는 1630년대 교토의 한 사찰에 책과 약을 파는 상점인 후지야(富士屋)를 세우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스미토모 가문은 오사카로 본거지를 옮기고 구리 제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련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에도시대(1603~1867) 일본의 제련 사업을 사실상 독점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에도시대 당시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무역에서 초창기에는 은이 일본의 최대 수출품이었으나 은의 생산이 격감하면서 에도시대 내내 구리가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중국상인들이 가져온 물품에 대한 지불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막부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의 생산과 유통은 막부의 지대한 관심사였는데 일본의 대표적 구리광산인 아키타번의 인나이 광산등 일본 전국에서 생산된 구리는 현지에서 일차적인 가공을 거쳐 불순물이 함유된 상태로 모두 오사카로 보내져 막부의 감독하에서 오사카의 제련업자들이 최종 제련하였다. 당시 일본내에서 구리를 최종제련해서 은과 기타 불순물을 분리하고 순도높은 구리를 생산하는 기술은 오사카의 제련업자들이 1600년대 이래로 100년넘게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한 막부의 시책(구리제련업을 오사카로 집중시킴으로써 구리의 생산을 완벽히 통제하고 수출용 구리와 화폐주조용 구리를 최대한 확보한다는 시책)은 오사카의 제련업자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보장해줬는데 스미토모가문은 일본 최대 규모의 제련업자로써 조합 전체 의결권 8주 중 3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1868~1912) 초반까지 직접 구리광산 개발을 하여 관련 사업들을 키우며 성장하기 시작하며 기업의 틀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재벌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재벌 해체 정책에 의거해서 1946년 1월에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후 1949년 거꾸로 다른 재벌보다도 빠르게 비공개 사장 모임 백수회(白水会, はくすいかい 하쿠스이카이)를 결성해 재결집에 들어갔다. 1951년 4월 공식적으로 발족했으며 전전 마지막 스미토모합자회사 총이사 후루타 슌노스케, 스미토모 상사의 토우지 슌야, 스미토모화학공업의 도이 마사하루를 주축으로 재결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